신나는 민원에피소드 - 너의 그 제초제(2)

2021. 3. 27. 15:08나는야 민원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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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회사 내부로 들어갔다가는 제초제를 뿌리고 난리가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고객을 데리고 건물 옆 테라스로 이동했다.

빨리 이 고객이 원하는 돈을 지급해줄 방법을 강구해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고객은 갑자기 본인의 인생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다.

민원인 중에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민원인이 바로 본인의 시시콜콜한 가정사(또는 인생사)를 쏟아내는 사람이다.

나는 본의아니게 우리 고객의 학교생활, 결혼생활, 수감된 사연까지 풀스토리를 듣게 되었다.

‘아 진짜 빨리 돈 주고 보내야 되는데 언제 얘기가 끝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얘기를 듣던 중 갑자기 고객이 주머니에 넣어둔 뭔가 꺼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제초제를 나한테 뿌리려고 꺼내는게 아닌지 불안하여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고객이 꺼낸 것은 ‘출소증명서’였다.

본인이 오늘 바로 출소하는 바람에 집에도 가지 못하여 신분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후 나는 고객에게 그 출소증명서를 한 부 복사해서 환급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안심시켰다.

출소증명서를 복사하고 오는 동안 건물에 들어와서 난동을 피지 않을까 염려되어 ‘고객님. 건물에 들어오시지 마시고 5분만 기다리시면 해결해드릴게요.’라고 한 뒤 쏜살같이 출소증명서를 복사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출소증명서로 신분을 확인해주어도 내 주머니에서 현금으로 주는 돈이 아니고서야 지급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초제라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민원인에게 예외적으로 출소증명서 확인 후 환급금을 지급해준다고 안내했다가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장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데 돈이 없다.’, ‘내일 돈 주더라도 오늘 찜질방 가야 하니 5만원만이라도....

 

진짜 내 지갑에서 오만원짜리 한 장 쥐어주고 돌려보내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순순히 내 개인돈을 줄 수는 없었다. 

일단 절차상 하루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간곡하게 설명을 했지만 고객은 제초제 먹고 죽겠다며 도를 넘는 행동까지 하고 말았다.

 

‘그럼 어디 한 번 제초제 그럼 드셔 보세요.’

‘저도 참 살기 힘든데, 그렇게 협박하시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주고 나도 이판사판입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을까?

마지막 날 퇴근을 앞둔 시점에 이런 일을 겪게 되니 나도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 같다.

1년간 받은 업무스트레스가 폭발해서일까, 회사의 다른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협심 때문이었을까. 절대 지지 않겠다는 결의로 하나로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 씩씩거리면서 대치한 지 5분쯤 지나고, 나에게 본인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다정하게 내 이름(성을 빼고 ㅇㅇ씨)을 부르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도 화가 풀린 모습을 보이며 사과를 전했고 내일 통장에 지급이 될 테니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렇게 제초제 고객은 어딘지모를 본인의 보금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다리가 풀려 한동안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가끔씩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고객이 제초제를 나한테 뿌리거나 몸싸움을 걸어왔다면 어땠을까?

 

나도 먹고살자고 회사에 들어와서 의도하지 않게 민원업무를 담당했을 뿐인데

이래서 제 명에 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시대 모든 민원담당자들 본인 건강 잘 챙기길 바라고, 본인의 몸을 던질 필요는 없다는 얘길 꼭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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